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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영웅, 대한민국을 간호하다’수기집 발간

작성자 관리자
2021.02.24
조회 3594

코로나 영웅, 대한민국을 간호하다수기집 발간

 

간호협회, 코로나와 싸우는 간호사의 생생한 현장 모습 담겨

코로나19 현장스토리 공모전 수기 27·사진 33점 등 수록

 

코로나 현장에서 활약한 간호사들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담은 수기집이 출간됐다.

 

대한간호협회(회장 신경림)23일 대구·경북 1차 대유행 당시 코로나 현장에서 간호사들이 보고, 느끼고, 듣고, 체험한 코로나 극복 수기 코로나 영웅, 대한민국을 간호하다를 펴냈다.

 

이 책에는 지난해 5월 간호협회가 실시한 코로나19 현장스토리 공모전 당선작 등 27편의 수기와 33점의 사진 등이 262 쪽에 담겨있다.

 

대구·경북에서 간호사가 부족하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간호협회는 전국에서 지원자를 모집했다. 31일 단 하루만 500명이 넘게 자원했고 두 달 만에 3,959명이 동참의 뜻을 밝혔다. 이렇게 모인 간호사들은 코로나병동의 하루하루를 일기처럼 써 내려갔고, 기억해 냈고, 그것을 기록했다.

 

왜 하필 당신이 꼭 가야만 하나라는 가족들의 만류에 간호사들은 대답한다. “나는 남을 돌보는 간호사라는 게 자랑스럽다.” “내가 아니더라도 간호사 누군가 가야 하는데 내가 먼저 가겠다.”

 

간호사의 길이 얼마나 어렵고 고독한 것인지 이 책은 생생하게 증언한다. 어머니 임종조차 지키지 못했던 대구 파견 간호사, 암 진단을 받고도 간호사라는 사명감에 대구로 간 간호사, 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을 위해 한달음에 달려온 스페인 간호사, 이 모든 것이 한 편의 감동 드라마다.

 

특히 이 책에 실린 한 장의 손 사진을 보면 간호사의 사명감이 무엇인지 일깨워 준다. 손 사진의 주인공인 경기도의료원 이천병원 이학도 간호사. 그는 하루 종일 쉴 틈 없이 코로나 환자를 돌봤다. 두 겹, 세 겹의 장갑을 끼고 땀으로 범벅된 그의 손은 온통 부르텄다. 간호의 어려움과 고초를 생생하게 보여 준 간호사의 손. 그것은 바로 국민들의 생명을 살린 거룩한 손이었음은 말해주고 있다.

 

신경림 회장은 발간사에서 간호사들의 코로나 분투기는 간호사에 대한 연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 대한 사랑과 간호사로서의 사명감이었고, 이는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설 것이라고 말했다.

 

권덕철 보건복지부 장관은 추천사를 통해 간호사는 늘 환자 곁에서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는 버팀목이었다며 코로나19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간호사들이 보여준 숭고한 직업의식과 인간애는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고 밝혔다.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은 이 책은 코로나19 환자가 급증하면서 의료진이 부족해진 대구 경북지역에 어떻게 간호사가 모이게 됐는지, 병원에서 어떻게 돌봤고, 어떻게 코로나19를 극복했는지 생동감 넘치는 필치로 그려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책에서간호사들의 사명감은 교과서에서 공식처럼 배운 것이 아니라 위기의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는 현장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고 밝혔다.

 

[첨부1. ‘코로나 영웅, 대한민국을 간호하다수기집 발췌]

 

대구로 파견됐다가 코로나에 감염돼 43일간 음압병실에 입원했던 김성덕 간호사와 전주에서 대구로 6주간 자원했다가 31일간 음압병실에 있었던 강정화 간호사. 이들의 간호사에서 확진자로 두 세계를 경험한 글은 감동이 흐른다.

 

간호경력이 많고 업무에 익숙하더라도 절대 안전에 철저해야 한다. 보호구 입기 대회에서 1등을 했을 정도이지만, 코로나 현장은 생각이상으로 다르다. 파견근무를 마치고 자가 모니터링 13일째 되는 날, 입맛도 없었고 음식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양성 판정을 받고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2주가 지나면서 환청이 들렸고 간호사로서 자기관리를 하지 못한 죄책감이 다가왔다. 절망의 시간을 이겨내고 다시 환자를 돌보는 간호사로 돌아왔다. 환자들에게 이렇게 말을 건네고 싶다. “누구의 탓도 당신의 잘못도 아닙니다. 그러니 용기를 잃지 마세요.”(김성덕, 대전 보훈병원)

 

대구에서 인력부족이란 말을 듣고 퇴근뒤 대구로 가겠다고 결심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대구로 가기 전까지 가족들은 한사코 만류했다. 코로나로 홍콩에서 급히 귀국한 딸은 걱정했지만, ‘내뜻과 길을 응원해주었다. 영남대병원 402병동에서 6주간 근무했다. 모니터링이 끝나기 전날 양성 판정받았고 믿기지 않았다. 해질무렵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얼음 물을 끼얹는 듯한 통증을 느꼈고 가슴이 욱신거렸다. 현장 간호를 하던 내가 환자가 되어보니 불안감이 주는 고통이 아주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환자를 위한 작은 배려가 그들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큰 힘이 된다는 사실도 경험했다. 마음의 상처가 코로나보다 몇배 더 무서운 것이란 걸 깨달았다. (강정화, 전주 대자인병원)

 

 

간호사들이 대구로 모여 든 것은 두려움없는 사명감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을 영웅이라고 하는데 인색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 파견근무 대상자로 선정되었을 때 왜 하필 나일까라고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간호사라며 어떤 상황에서도 환자를 외면할 수 없다고 결심했다.(김지선 영남대 병원)

 

코로나환자가 급증하자 대구로 파견지원이 결정됐다. 지원하겠느냐는 질문에 가겠다고 답했다. 메르스를 겪을 때는 아무 것도 모르는 간호학생이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음에 감사했다.(이나윤 영주 적십자병원)

 

저는 아빠의 건강이 걱정되면서도 자랑스러웠어요. 왜냐하면 아빠는 코로나와 맞서 국민을 보호하는 간호사니까요. 2주 지난 뒤 아빠가 돌아왔어요. 막내는 아빠 곁에서 꼭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지요. 둘째 여동생은 아빠는 코로나라며 한동안 피해 다녔어요(초등학교 4학년 유준열)

 

나라를 지키는 군인을 직업으로 택한 아들과 인연을 맺고 갓 시집온지 1년 반밖에 안된 며늘아기가 위험천만한 그곳에 지원하여 간다니 당시 우리 심정은 걱정과 근심뿐이었다. 하지만 험지에서 고군분투하는 너를 도와줄 것이 없어서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른다(박성완, 국군 간호장교 김혜주 대위 시아버지)

 

 

코로나 환자를 돌보는 간호사들은 2시간 근무하고 쉬는 시간조차 사치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했고, 자신의 가족보다 환자 걱정부터 하면서 대한민국을 간호했다.

 

화장실을 한번 갈 때마다 방호복을 교환해야 하기 때문에 화장실 가는 횟수를 줄이고 혈세를 낭비하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커피와 카페인 음료는 마시지 않았다.(한순욱, 퇴직후 자원자)

 

의료진 모집광고를 보고 지원했다. 신혼생활 1년차다. 묶음 머리가 불편해서 단발로 잘랐다. 간호활동이 조금 더 편해질듯하다(정지윤 영남대병원)

 

아빠도 응급실에서 환자를 간호하는데 엄마마저 코로나 중환자실에 근무하면 우리 아들은 누가 돌봐야 할까. 사명감보다 모성애가 앞서는 건 어쩔수 없었다. 결국 정부모님께 아이를 맡겼다. 시골에 아이를 맡기고 돌아서면서도 손 흔드는 아이의 모습이 떠올라 눈시울이 붉어졌다.(김민아 칠곡경북대병원)

 

나는 수 간호선생님에게 현장이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가겠다고 말했고, 제일 먼저 남편을 시댁으로 보냈다. 혹시 모를 감염에서 우리 가족을 지키려면 어쩔 수 없었다. 여덟살 딸은 나는 엄마를 믿어 용기내고 건강하게 돌아와요라는 말에 울컥했다.(박서현, 대구가톨릭대학병원)

 

 

죽음을 눈앞에 둔 환자 앞에서 이들은 환자와 가족을 이어주는 메신저였고, 이들은 죽음 앞에 초연했다.

 

오 남매를 둔 90대 환자는 매일같이 딸과 손자, 손녀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난청이 있지만 큰 소리로 얘기하면 들을 수 있다고 했다. 그 뒤 우리는 매일 편지를 읽어드렸다. 자주 목이 메 읽기가 쉽지 않았다. 오십 대 후반의 딸이 방호복을 입고 임종실로 들어왔다. 노모는 겨우 눈을 떴지만,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다. 다음 날 할머니는 편안한 모습으로 돌아가셨다. 환자와 정이 든 간호사들은 눈물을 훔쳤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슬픔을 삼켰다. 간호사라는 이유로 죽음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라고 하기에는 실로 고통스러웠다.(이주리 간호사, 대구가톨릭대학교병원)

 

엄마 미안해, 바쁘다며 자주 찾아가지 못하고, 내가 그동안 엄마 너무 외롭게해서 정말 미안해.”핸드폰 스피커를 통해 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할머니는 간신히 의식을 찾고 나서 두 눈이 초승달처럼 웃었다. 그 순간 나는 할머니 귀에대고 할머니도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라고 말했다. 할머니는 가쁜 숨을 쉬며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큰 소리로 말했다. “딸아 나도 많이 사랑해, 사랑해” (신혜민 영남대병원)

 

장기간 입원하여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 할아버님이 죽기 전에 꼭 한번 짜장면을 먹고 싶다고 하셨다. 평소에 좋아하는 음식 생각이 나셨던 모양이었다. 우리는 당황했지만 영양실의 협조를 얻어 따뜻한 짜장면을 만들어드렸다. 그리도 좋아하신 짜장면 한 그릇을 다 비우지 못하셨지만, 할아버님이 좋아하던 모습을 지울 수 없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곳에서 사람이 전할 수 있는 따뜻한 온정은 서로에게 힘을 준다. (안영길, 동국대학교 경주병원)

 

38일 일요일, 대구로 파견나온 박○○ 주임 간호사의 모친께서 소천하셨다. 며칠 전 코로나19 확진자 모녀의 소식을 전하면서 서로 울면서 그 아픔을 함께 나누었는데 정작 박 주임은 어머니의 임종조차 볼 수 없었다. 억장이 무너지는 날이다. 병원의 직원 모두가 명복을 빌었고, 그 슬픔에 한동안 멍할 수밖에 없었다. (김경화 간호사,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 중앙보훈병원)

 

 

환자의 회복을 위하여

 

내가 음압격리병실에 들어가면 2시간 이내에 계획한 모든 처치와 간호를 실행해야 했다. 일에 집중하다 보면 마스크와 장비로 답답했고 고글이 머리를 눌러 두통이 발생했다. 방호복 속에는 온통 땀으로 흥건했고 얼굴에 눌린 자국은 퇴근할 때까지 지워지지 않았다. 상상할 수 없는 짧은 휴식에, 다 식은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환자의 회복을 위해서 서로를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이겨냈다.(김민아 칠곡경북대병원)

 

청도대남병원에서 정신과 약을 제대로 먹지 않은 일부 환자들에게 억눌러있는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간호사의 얼굴에 침을 뱉거나 환자의 공격에 의해 방호복이 찟어지기도 했다. 진정제를 투여하다가 환자의 강한 발길질에 배를 걷어차이기도 했다. 환자 앞에서는 태연하게 주사처치를 했지만 걷어차인 복부 통증으로 병실에서 나온 순간 그대로 주저 앉기도 했다.(이재운 국립부곡병원)

 

이중 삼중의 장갑을 끼고 레벨D 방호복을 착용하면 10분만 움직여도 땀이 쏟아지고 고글에 습기가 찼다. 두 시간이 지나면서 두통을 호소하는 사람도 있었다. 권장 시간 두 시간을 훌쩍 넘겨 56시간을 일했다. 집에 갈 수 없어서 구석진 곳에서 움크리고 잠을 청하기도 했다.(이나윤 영주적십자병원)

 

방호복은 땀과의 전쟁이다. 화장실 가기도 힘들어서 물이나 커피도 마실 수가 없었다. N95 마스크를 착용하면 코가 막히고 입안은 쉽게 건조해졌다. 끈이 닿는 귀 뒤쪽은 벌겋게 달았고, 콧잔등이 항상 붉게 헐어 있었다. 바이러스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장비는 그만큼 혹독한 댓가를 치러야 했다.(이주리 대구가톨릭병원)